기억은 줄줄이 사탕과 같아서 한 사탕이 엮어져 나오면 다른 사탕이 줄줄이 흘러나온다. 집에서, 그리고 고척돔에서 이번 한국시리즈를 지켜보며 야구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그것들을 한번 정리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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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의 어느 날. 국민학교 1학년.
어렸을 때의 동생은 유난히 아팠고 엄마와 같이 동생의 진찰을 위해 찾았던 일신기독병원은 항상 사람이 많았다. 대기번호가 길어져서 내가 지루해할때면 엄마는 나를 대합실에서 야구를 보고 오라고 이끌었다. 나는 대합실에서 뭔지도 모르고 다양한 아저씨들과 박수를 치며 다같이 야구를 봤다. 연지동의 동네형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독수리가 요리조리 피하면서 거인의 심장을 파먹고 눈알을 뽑을거라 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2
1995년의 어느 날. 초등학교 4학년.
감전동으로 전학갔을 때, 옆집에 살았던 S는 서울에서 온 아이였고 트윈스를 좋아했다. 나에게 이상훈은 우리나라에서 야구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라고 자랑하곤 했다. 그 해 플레이오프. 내가 옆에서 계속 깐족거리자 항상 당차던 S가 닭똥같은 눈물을 보였다. 또 다른 친구와 시민회관에 어린이연극을 보러간 적이 있었는데 온 도시가 썰렁했다. 그날이 포스트시즌에서 주형광이 등판하는 날이었다. 주형광이 등판했던 날은 부산 시내가 썰렁해지는 날이었고, 그것이 아마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시리즈이다. 오비 베어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한국시리즈 최종전은 4대2로 오비 베어스가 이겼다.
3
1999년의 어느 날.
컴퓨터를 사고 나서 컴퓨터에 푹 빠져있었다. 스타크래프트라던가, 창세기전이라던가... 거인의 한국시리즈는 간간히 지나가며 봤다. 그래도 임수혁과 마해영과 박정태와 호세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임수혁을 외쳤던 그 해의 한국시리즈 마지막. 다음날 학교에서 친구들과 왜 임수혁을 안썼을까에 대한 깊은 토론을 나누었다. 감독이 까인건 두말할 나위없다.
4
2001년의 어느 날.
부산고와 경남고의 화랑대기. 지금은 사라진 화랑대기와 지금은 사라진 구덕야구장.
5
2006년의 어느 날.
강원도 인제에 어느 군부대에 있던 나이많은 목사님은 항상 그 해의 마지막 예배시간에 신년소원을 적어서 내도록 했다. 나는 여러가지를 썼는데 그 중에 하나가 '롯데 자이언츠의 한국시리즈 우승' 이었다. 목사님은 그 신년소원들을 기도시간에 육성으로 읽어주시며 기도를 해주셨다. '롯데 자이언츠의 한국시리즈 우승' 이라는 문구가 나오자 주위의 병사들 속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이 들렸다.
6
2011년과 2012년의 어느 날.
나는 취업시장에서 고전하고 있었고 주위의 거인패들은(팬이 아니라 패거리다) 엔씨가 생기는 걸 마뜩치 않아했다. 친구만나러 창원에 갔다가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과 엔씨 다이노스가 생기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창원 기사님은 부산팀임에도 같이 거인을 응원했었는데 이제 자기 도시에 야구팀이 생긴다고 하니까 거인패들이 반대하니 섭섭하다고 했다.
여러가지 이유들이 겹쳐져서 거인을 안좋아하기 시작했다. 거인은 근 몇 년 사이 가장 잘나가는 시절이었지만 오히려 나는 야구를 그 몇 년 사이 가장 안 본 시절이었다.
7
2013년의 어느 날.
그 해의 엔씨의 마지막 창원 홈 게임. 그날 이후로 나는 엔씨팬이 되었다.
8
2015년의 어느 날.
정말 감사와 은혜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직장이었고 좋은 동료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일부 사람에게는 나는 단 한마디로 설명이 되었다.
점마 엔씨팬 아이가!
바리에이션으로 점마 빨갱이 아이가! 가 첨가가 되면 나는 말도 걸어선 안되는 불가촉천민이 되었다. 내가 어떤 인성을 가졌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엔씨빠에 빨갱이였다. 이후 내가 야구를 보지 않는 날이 오면 모를까 부산에서 살아갈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다.
9
2016년의 어느 날.
퇴사를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엔씨 다이노스는 두산 베어스와 한국시리즈를 했다. 나는 3차전과 4차전 직관을 했다. 야구가 끝난 그 날, 밤늦게 2번 국도를 타고 진해에서 용원으로 들어오며 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을 운전했다. 그 길이 나의 앞길 같았다. 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다음날 회사에서는 개나소나 나에게 와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엔씨 다이노스는 한국시리즈 역대 최소득점의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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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의 어느 날. 서울.
올해 만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무슨 야구팀을 좋아하냐고 물어봤다. 내가 엔씨 다이노스를 좋아한다고 하자 대뜸 내 앞에서 '엔씨발'이라고 말했다. 내가 당황해하며 그 단어를 오프라인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고 웃으면서 대처하자 그 사람은 자기 친구가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중에 내 친구가 그 사람을 보고 뭐라고 말했는지 옮겨주고 싶었다.
2020년의 한국시리즈에서는 다시 두산 베어스와 엔씨 다이노스가 만났다. 두산 베어스는 한국시리즈 역대 최다연속이닝(25이닝) 무득점 기록을 세웠다. 두산 베어스와 엔씨 다이노스의 한국시리즈 최종전은 4대2로 엔씨 다이노스가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