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두번째로 사게된 DVD가 있었다. 그전까지 나는 DVD란 것을 산다는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비디오대여점에 가면 한구석에 있는 DVD코너에서 빌려오는 정도나 아니면 인터넷으로 다운받는 정도의 개념이였다. 그러다 이 영화는 소장하고 싶다고 생각이 처음으로 든 게 러브레터란 영화였고, 그 영화를 계기로 DVD를 조금이나마 소장하게 되었는데, 그 두번째가 바로 이 패왕별희였다.
솔직히 말하면 난 장국영이란 배우를 잘 알지 못한다. 장국영에 대한 기억은 잘생긴 홍콩배우란 이미지다. 거기다가 어린시절에 본 종횡사해라는 영화에서 유덕화와 같이 나온 장국영을 보게 되었고, 그 장국영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꽤나 매력적인 배우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시절 전해들은 장국영의 자살. 이 것을 계기로 난 배우 장국영에 대해 알고 싶어졌고, 인터넷을 통해 장국영의 생애와 출연작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장국영이 나온 영화를 여러편 보게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멋있는 작품은 아비정전이란 영화였다(장국영 영화 전부를 본 것은 아니다.). 장만옥에게 작업을 거는 장국영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내가 한번 따라해보고 싶을 정도로... 그의 영화들을 하나씩 보면서 점점 늘어가고 성장해가는 장국영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의 영화들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리고 패왕별희를 사서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청나라가 망하고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는 중국현대사의 격변기를 시대배경으로 담고 있다. 그 속에서 경극의 두 주인공 데이(장국영분)와 샬로(장풍의분)의 이야기가 바로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다. 그리고 영화의 이름처럼 패왕별희란 경극을 주요 소재로 삼아 영화는 진행된다.
데이는 곱상한 외모로 패왕별희란 극에서 여자역활인 우희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본래 사내아이가 계집아이를 잘 흉내낼 수는 없는 법. 공연을 앞두고 그는 자기가 맡은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한다. 그때 어릴적부터 자기를 지켜주던 샬로가 데이의 입에 불타고 있던 담뱃대를 집어넣는다. 이윽고 입에서 피가 나고 데이는 그토록 잘 외기 힘들던 노래를 완벽하게 외게 된다. 그리고 사부는 이렇게 말한다. "데이야, 운명에 거역하려 하지 말아라."
패왕별희란 경극은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초패왕과 우희란 절세미인의 이야기다. 초패왕의 죽음이 가까워지고 초패왕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우희와 자기의 말을 도망가게 한다. 하지만, 자기의 말과 우희는 도망가지 않고, 자결한다. 자신의 운명이 여기까지임을 알고 그 운명에 순응한 것이다. 우희가 만약 도망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그 운명에 당당히 맞서 자기의 길을 열었다면 우희와 초패왕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희는 운명에 거역하지 않았고, 결국 패왕별희는 지금까지도 비극의 결말로서 내려오고 있다. 데이는 자기의 운명을 거역하지 않는다. 말그대로 수동적인 우희의 삶을 그대로 살아 온다. 그리고 샬로와의 관계도 패왕별희 극중에서처럼 정상을 넘어선 집착을 보여준다.
데이는 수동적인 삶을 살았다. 어릴때 극단을 탈출할 기회가 왔음에도 그는 탈출하지 않았고, 일본군이 진주해왔을때 그는 역시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이끌려 다니기만 한다. 그리고 일본군이 항복하고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이 서로 대치하는 치열한 세상의 격변기속에서도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이끌려 다니기만 한다.
데이는 현실적으로 보면 정말 무능한 인물이다. 자신의 운명을 능동적으로 만들어가지 못하고 영화내내 수동적으로 이끌려 다닌다. 하지만 그는 예술인이다. 그가 원해서 예술인이 되었든 아니든 그는 예술인이다. 그리고 그는 완벽한 패왕별희의 완성을 위해 몰입한다. 그는 자기자신을 지켜주던 샬로에게 담뱃대를 물렸을때부터 샬로가 자기에게 원하는 역할을 알게 되었고, 그 역할을 일생동안 살아오며 행동하게 된다.
결국 그는 샬로와 함께 마지막으로 패왕별희를 공연하며 자살한다. 샬로와 함께 마지막 공연을 하면서 그는 예술과 현실의 경계를 뛰어넘는 진정한 패왕별희를 완성한다. 세월이 지나 늙고 초라하지만 그 둘은 여전히 패왕과 우희였고, 데이와 샬로는 비극적인 내용의 패왕별희를 완성한다.
데이 : 대왕마마, 어서 첩에게 검을 주소서.
샬로 : 절대 아니되오! 네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순 없다.
데이 : 어서 검을 주소서
샬로 : 당치 않소!
데이 : 하아~ 힘들다.
샬로 : 이젠 정말 늙었어.
데이 : 나는 비구니. 사부에게 머리를 깍여,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서 계집아이도 아닌데...
샬로 : 틀렸다!
데이 :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 계집아이도 아닌데...
샬로 : 자, 우리 다시 한번 하자!
데이 : 대왕마마, 어서 첩에게 검을 주소서.
샬로 : 절대 아니되오! 네가 죽게 할 순 없어.
데이 : 어서 검을 주소서.
샬로 : 당치 않소!
데이 : 대왕마마, 어서 검을 주소서
샬로 : 아니되오.
데이 : 저기 한나라 군사들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샬로 : 어디?
데이, 샬로에게서 칼집의 칼을 빼서 자결한다.
샬로 : 데이! 도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