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여자농구 시즌이 끝났다. 한국여자농구리그는 WKBL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우리은행팀이 최종 우승자가 되었다. 모든 스포츠 팬이 그렇겠지만 이제 시즌이 끝났으니 그 빈자리를 채워줄 다른 스포츠를 봐야하는데, 야구는 이제 보기가 싫다. 야구는 더럽게도 못하면서 게임은 매일해서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 KBO는 캐돼지 베이스볼 오거나이제이션의 약자인가. 평일 저녁에는 책이나 드라마나 좀 챙겨보다가 주말에는 F1이나 보면서 여자농구 시즌이 개막할 때까지 기다려야 겠다.
원래는 겨울이면 여자배구를 많이 봤었는데, 지난 겨울에는 여자배구를 보는 것에 대한 회의가 참 많이 들었다. 나는 집에서 TV중계를 보기보다는 현장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서 직관을 자주 가는 편인데 매번 여자배구를 보러 갈 때마다 제발 이번에는 3:0으로 끝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내 모습을 직면하게 되었다. 명승부를 바라거나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길 바란다기 보다 어느 팀이 이기든 제발 3:0으로 끝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이 과연 정상인 것일까. 매번 배구장에서 세트스코어 3:0, 게임시간 80분 이내의 허무한 경기결과를 지켜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귀갓길에서 계속 그런 생각을 해왔다. 그리고 배구는 직접 하면 정말 재밌는 스포츠이지만, 프로스포츠로 즐기는 것을 적절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정적인 계기는 12월 모일날 광주에서 있었던 AI페퍼스팀과 A팀과의 경기였다. 그 날은 우리 집에 정말 큰 눈이 왔다. 큰 길까지는 제설이 어느정도 되었지만 우리 집 앞 작은 도로까지는 제설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 날 저녁에 광주에서 있는 여자배구 경기 예매를 해놨었는데 갈지말지 많은 고민을 했다. 왜냐하면 차는 우리 집 앞에 있었는데 차를 빼낼려면 큰 길까지의 작은 도로에 쌓인 눈을 내가 직접 치워야 했기 때문이다. 눈을 치우지 않고 버스로 광주까지는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눈이 진짜 많이 왔기 때문에 광주에서 우리 지역으로는 오는 시외버스가 저녁 늦게에는 운행을 하지 않았다. 내가 광주로 배구를 보러 간다면 직접 눈을 치워서 운전해서 가야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그 날 저녁쯤에는 눈이 그치기 시작한다는 예보는 본 기억이 나서 출발하는 시점에는 내리지만 광주까지 가다보면 그칠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고생스럽지만 집 앞 도로의 눈을 치웠다. 1시간 30분 정도 눈을 치우고 차를 몰고 나왔다. 근데 예상과는 달리, 광주까지 가면 갈수록 눈이 더 많이 내렸다. 광주 시내는 차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쌓였고 천천히 운행하느라 1시간이면 갈 거리를 거의 2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했다.
그리고 AI페퍼스와 A팀과의 게임을 봤는데 게임은 역시나 무난한 3:0의 A팀 승리였다. 전력상 A팀이 이길거라 예상했지만 이번만은 제발 3:0 승리가 아니라 3:1이나 3:2 승리를 바랬다. 왜냐하면 오는 길이 너무 고생스러웠는데 3:0으로 끝난 게임을 보고 돌아가면 깊은 허무함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7시가 게임시작이었는데 게임이 끝나니 8시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여자배구는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이 버스를 타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퇴근하는 배구선수들이 팬에게 사인을 해주거나 사진을 같이 찍어주거나 팬서비스를 잘해준다. 사회적으로 많은 지탄을 받는 야구선수의 퇴근길 팬서비스와는 달리 말이다. 내가 그 곳에서 대부분 동생나이인 선수들에게 사진을 먼저 찍어달라거나 사인을 해달라고는 잘 하지 않는다. 단지 팬들이 요청하고 선수들이 그런 것에 대응을 잘 해주기 때문에 가까이서 선수들을 지켜볼 수 있으니까 구경하러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물론 사람이 많으면 잘 가지 않지만 그 날은 너무 허무하게 끝난데다 광주의 날씨가 너무 안좋았기 때문에 관중도 몇 없었다. 그래서 선수들 퇴근길을 구경가기로 했다.
AI페퍼스의 팬서비스는 대체로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제일 인기가 많았던 이한비, 이고은 선수와 기타 등등의 선수들이 팬들의 요청에 잘 대응을 해줬다. AI페퍼스의 상대팀인 A팀도 그런대로 잘 해줬던 것 같은데 그 팀에서 꽤 인기가 있는 두 선수의 대응은 좀 충격적이었다. 한 명은 폼롤러 3개를 들고 나왔는데 팬들이 B선수 사인 해주세요 하니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팬들을 지나쳐 버스로 들어가 버렸다. B선수가 안에 들어가니까 팬들이 B선수 나와주세요 했지만 결국 나오지 않았다. 또 다른 C선수는 무릎에 아이싱을 크게 해서 나왔는데 팬들이 C선수 사인해주세요 하니까 그냥 쿨하게 무시하고 버스를 타버렸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D선수가 팬이 불쌍해보였는지 대신 사인을 해줬다. 기존에 배구선수들의 팬서비스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무척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배구선수들은 진짜 팬서비스가 좋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A팀은 게임에서 이겼다. 게임에서 지면 선수들 분위기가 좀 다운되어 있기 때문에 사인요청을 하기가 미안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았고 게다가 A팀 팬의 숫자는 많지도 않았다. 끽해봐야 20명 남짓 되었을까. 선수들이 대충 버스를 다 타고 남은 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광주에 시내버스가 폭설로 끊겨서 집으로 걸어간다고 했다. 팬들이 그 날 경기장에 오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선수들은 알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무척이나 험했다. 다 돌아와서 정산을 해보니 게임은 1시간 20분이고, 인상적으로 남은 것은 연예인병 걸린 일부 배구선수들인데, 내가 투자한 것은 눈 치우는 것 1시간 30분, 왕복 4시간의 이동시간이었다. 뭐 기름값, 고속도로 통행비, 눈 치우며 어깨 결린 것의 파스비용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심하게 현타가 왔다. 그래서 그 이후 여자배구는 잘 안 보게 되었다. 여자배구를 잘 안보게 되자 비슷한 시간대에 하는 여자농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저번 도쿄올림픽 때 본 기억이 나서 유명한 선수들을 팔로우하면서 자연스럽게 여자배구에서 여자농구로 갈아타게 되었다. 나는 원래 트랜지션에 능하다.
전라도에는 여자농구팀이 없다. 전북은행 보고있나? 그나마 가까운 팀이 청주에 KB스타즈가 있고, 아산에 우리은행 우리WON이 있다. 그래서 집에서 TV로 몇 경기 보다가 청주로 KB스타즈 경기를 보고 왔다.
청주실내체육관을 들어가면 전 관중에게 핫팩을 나눠준다. 관중석으로 들어가니 온통 노란색으로 도배가 되어있어서 게임을 보는 분위기가 살았다. 아마 국민은행이 노란색과 검은색을 쓰기 때문인 것 같았다. 선수소개를 하고 선수들이 들어왔는데 인상적인 것은 배구와 달리 선수들이 관중에게 공을 던져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근데 나는 이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선수들이 공을 던져주면 골고루 나눠줘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자기 가족들이나 친목질하는 팬에게만 나눠줘서 공을 못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참 빈정이 상했기 때문이다. 특히 날씨가 궂어서 관중이 몇 없을 때는 더 박탈감이 심했다. 어느 관중은 선수가 주는 공을 세 개씩 챙겨가는데 바로 옆의 관중은 그냥 들러리로 뻘쭘하게 앉아있어야 했다. 그럴거면 차라리 모든 관중에게 핫팩을 돌리던가 입장료를 깎는게 낫지 않나 싶다.
청주 KB스타즈 같은 경우에 주말 2층 일반석이 개나소나 다 가지고 있는 국민은행 체크카드로 결제를 하면 예매수수료 포함 5,800원이다. 청주체육관에서는 그 곳에서만 살 수 있는 농구공 모양의 도넛 2개를 살 수 있는데 그게 6,000원이니 그거를 먹고도 12,000원이 되지 않는다. 물론 나중에 여자농구의 인기가 오르면 가격도 오를 수 있지만 요즘 11,800원으로 약 2시간 가량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공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날 게임도 꽤 재밌었다. BNK와 KB 게임이었는데 엎치락 뒤치락하다고 게임종료 4.7초를 앞두고 BNK가 마침내 역전을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 번의 공격에서 KB가 라스트 샷을 성공시키며 KB스타즈가 승리한 게임이었다. 여자농구 직관은 처음 했었는데 매우 인상적인 게임이었다. 물론 게임이 끝난 이후 팬서비스도 괜찮았다. KB에는 국가대표급 선수가 강이슬, 박지수, 허예은 선수가 있는데 다들 팬서비스가 좋았다.
이제 여자배구 보러 갈 일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