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9 추가)
작년 모 교회의 담임목사가 주일설교시간에 아버지를 공공연히 욕되게 하는 것은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며 그 죄는 자기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밑의 자손들까지도 영원히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혹시나 밑의 글(아버지와 나, 1984최동원, 2021.11.13)이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글을 비공개처리했다. 그런데 최근에 거의 40년만에 안 사실이 있다. 나의 아버지는 나르시시스트 아버지였다. 그래서 혹시나 나와 비슷한 처지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나처럼 자기혐오에 빠지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글을 공개하기로 했다.
나의 아버지는 내현성 나르시시스트다. 술먹으면 폭력적인 성향이 굉장히 강해진다. 어렸을 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술만 먹으면 다 개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초등학교 고학년 때 친구네 아버지가 술먹고 기분이 좋아져서 펜티엄2 PC를 사줬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또한 아버지는 항상 돈돈 거렸지만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외도할 것이라는 의심을 항상했고 그것이 폭력으로 이어졌다. 아마 초등학교 때까지는 공부잘하는 아들이었던 나는 골든차일드였고,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 점점 아버지의 이상한 점을 눈치를 채어갔기 때문에 스케이프고트가 되었던 듯 싶다.
사실 우리 아버지는 거창군 북상초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다. 우리 어머니는 안동대학교 무역학과 80학번으로 학사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두 분의 만남에 대해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지만 이 블로그에다가 그 이야기를 적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평생을 어머니께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중학교 1학년 때 이혼직전까지 갔던 그 사건이다.
아버지는 버스운전을 하셨는데, 혼자 외벌이를 하다가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고 동생도 유치원에 보내야 하니 어머니가 일을 시작하셨다. 이른바 경단녀라 할 수 있는데 일이 마땅히 없었는지 보험회사에 가서 일을 했다. 근데 보험회사에서의 주변 설계사들보다는 학벌이 너무 좋았는지 엄마가 돈을 잘 벌었다. 아버지보다도 돈을 잘 벌었던 것 같다. 어쩐 이유인줄은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엄마가 일하는 사무실에 술먹고 찾아가서 행패를 부린 적이 있었다. 이 놈의 A생명 때문에 이 여자가 바람이 들었다고 하면서 난리를 쳤다. 엄마는 그 모습을 보고 이 남자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 날, 자고 있었는데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가 울면서 나를 깨웠다. 평소의 패턴이라면 지는 똥방위병 출신이면서 군기가 빠졌다면 시원하게 몽둥이 찜질을 해야 하는데, 그 날은 울면서 나를 깨웠다. 그리고 아무래도 너희 어머니가 바람이 난 것 같다면서, 이제 엄마와 헤어져야 될 것 같다고 말을 했다. 내가 그 말을 잘 믿지 않자 그 남자를 자기가 봤다면서 역성을 냈다. 그러면서 니가 이제는 중학생이니 누구와 살지 결정을 해야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빠가 이렇게 진지하게 울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거짓말을 할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랑 살래요 라고 말을 했다.
한 이틀쯤 지났을까 하교하고 집에 와있는데 동네 시장에 있는 갈비집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동생을 데리고 나갔다. 아버지와 엄마가 앉아있었고, 엄마가 담담하게 말을 했다. 이제 우리가 이혼을 할 것인데, B야 너도 이제 중학생이니 니가 누구랑 살지 정하라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엄마가 진짜 바람이 났긴 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랑 살래요 라고 말을 했다. 그 옆에 있던 7살 어린 동생도 내 모습을 보고는 나는 형이랑 살고 싶어요 라는 말을 했다. 그 순간 어머니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서 나와 동생은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왔고 엄마는 그냥 회사가봐야 한다고 해서 다시 회사로 갔다.
근데 하루가 지났을까 학교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보니 엄마가 와있었다. 그래서 엄마보고 다시 우리와 살기로 했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엄마가 응 다시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아버지의 학대를 알고 있었던 엄마는 당연히 나와 동생이 엄마와 같이 살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자기 아들 둘을 다른 집에 보내고 도저히 혼자서 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시간이 되어 어머니께 그 사건을 물어봤다. 정말 바람을 피셨냐고 물어봤더니 펄쩍 뛰면서 자기가 영업상 만난 모든 사람들하고 통화를 시켜줄 수 있다고 절대 바람피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술먹고 A생명 사무실로 찾아온 사건을 나에게 이야기해줬다. 내가 아버지를 사람취급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사건 이후였다. 그리고 나서 내가 지켜보게 된 것은 빛나는 커리어 우먼이었던 엄마가 점점 빛을 잃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진짜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평생 내가 갚아야할 빚이라고 생각한다. (보험영업의 특성상 직장인이 퇴근한 다음에 만나서 영업활동을 해야 하는데 남편이 저리 의처증에 심한 편집증 증세를 가지고 있으면 제대로 영업을 하기가 힘들다.)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군대에 갔다가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당시 아버지는 통근버스 지입기사를 하고 계셨는데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되어서 한 2년간 집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엄마가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해서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이 있었다. 그래서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기 전에 아버지와 작별인사를 하면서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하는데 아버지도 운전이 아니더라도 다른 일을 좀 구해보는 게 어떠세요? 라고 했더니 아버지의 말이 아직도 떠오른다. 혼잣말을 하듯이 툭 한마디 던졌다. "한 사람만 희생하면 되잖아."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항상 나에게 한 말이 있다.
"니는 임마 남자가 술에 물탄듯, 물에 술탄듯 그래서 되겠냐?"
"일어나, 어디 아빠가 퇴근안했는데 집에서 쳐자빠자고 있어? 군기가 빠져서 안되겠다." (당시 시간은 11시쯤이었던 것 같고, 아버지는 똥방위병 출신이다.)
"니가 임마 공부를 더 잘해야 내가 버스회사에 가서 인정도 받고 니 성적으로 장학금도 타먹고 할 거 아니가."
"니 저번에 전교 15등(중학교)에서 지금 25등으로 도대체 몇 등이나 떨어졌노? 추락하는 새에게는 날개가 있나?"
"니는 공부도 못하고, 체육도 못하고, 미술도 못하고, 음악도 못하고, 도대체 잘하는게 뭐가 있노?"
이제 내년이면 내 나이도 마흔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아버지 전화를 받기가 두렵다. 그래도 한번씩 전화는 받는데, 받으면 니는 아들이 되어갖고 아버지한테 연락도 안하고 하면서 쌍욕부터 박고 시작한다. 이게 1~2년만에 연락와서 그러는게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씩 전화하지 않으면 그 다음에 전화와서 이렇게 쌍욕을 박는다. 그래서 전화를 또 피하다보면 문자로 저주의 말과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니 더 상종을 하기 싫어진다.
예전에 부산에서 어떤 교회를 다닐 때 아버지 문제를 두고 목사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십계명에서는 부모님을 공경하라 라고 했지만 저는 도저히 아버지를 공경할 수가 없다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 목사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공경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 당시에는 그래야 되는구나 생각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하나마나한 답변이 아닌가 싶다. 자기일이 아니니까 쉽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는 상대방을 조종하기 위해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타입의 나르시시시트이다. 나를 자극해서 내가 화를 내면 은근슬쩍 즐긴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았다. 그런 사람은 아예 어울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고 나르시시스트라는 개념을 알기전에 나는 그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공경하라는 것인가.
그래서 이 블로그 글을 다시 공개하기로 했다. 내가 평생을 두고 믿고 살아갈 예수라는 이름과 나의 아버지라는 존재는 내 인생에서 평생 살아가며 풀어가야할 숙제일 것 같다. 나를 학대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공경하라는 계명 사이에서 나는 언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죽어서도 블로그를 할 수 있다면 그 숙제의 결과를 여기에다 기록해두고 싶다.
(2021-11-13 원문: 아버지와 나, 1984최동원)
※ 영화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부산을 나온지 5년. 예전의 나에게는 롯데를 싫어하는 마음과 NC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롯데를 싫어하는 마음은 휘발되고 NC를 좋아하는 마음만 남아있다. 요즘 부쩍 생각하는 것은 그 때의 나는 왜 그렇게 롯데를 싫어했을까 이다. 롯데기업에 대한 안좋은 기억은 분명히 있었다. 근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게 가장 직접적인 것은 아니었다. 또 롯데팬들이 NC팬들을 터부시하는 것 때문일까. 그런것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느정도 단계에 다달랐을때의 이야기다. 초반부터 롯데를 싫어하는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이다. 더 직접적인.
내가 반골기질이 있는 사람이여서 일까? 아니다. 만약 내가 반골기질이 넘치는 사람이였다면 부산사람 모두가 반골기질 넘치는 사람일꺼라 생각한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부산사람 중 하나였다. 아 한가지 있다. 나는 아버지를 무척 싫어했다. 아니 사람취급 안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아버지는 부산의 대도운수 77번 버스기사였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일때 아버지는 명예퇴직을 당했다. 명예퇴직을 하고 받은 몇 푼 안되는 돈과 그 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작은 사업을 시작했는데 시작하고 4개월만에 가게를 접었다. 애초에 사업가 기질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가게점포를 얻어놓고 가게를 나가지를 않는데 가게가 잘 돌아갈리가 있겠는가.
이리저리 쉬는 생활을 보내다가 고등학교 2학년때 통근버스차를 중고로 구입해서 울산에서 출퇴근 일을 했다. 그동안 고등학생과 초등학생(우리 동생은 나와 7살 차이가 난다.)의 생계를 책임진 우리 엄마는 빚을 갚을 수 있겠다고 좋아했다. 울산에서 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처음 한두달은 생활비로 150만원 가량 보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마저도 중고차 수명이 몇 년 안남았으니, 새 차를 사기 위한 돈을 모아야 한다고 한명에 20만원씩 한달에 40만원 이상은 보낼 수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돈으로 어떻게 생활하냐고 했지만, 아버지는 이 여자 말만 듣고 별로 좋지도 않은 중고차를 비싸게 샀다고 오히려 어머니를 욕했다. 이게 바로 요즘 말로하면 진짜 가스라이팅이 아닐까.
그 이후로도 그런 생활이 계속됐다. 일주일에 한번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은, 온 집안이 전쟁을 하는 날이었다. 맨날 레파토리는 똑같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했고, 아버지는 돈이 없다고 하고 집을 나갔다. 그리고 술을 먹고 들어와서 행패부리고 당시 수험생이었던 나는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가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내가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갔다오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질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군대를 다녀와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단지 예전엔 내가 고등학생이었다면 당시는 동생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뿐이었다.
고등학생까지만 해도 나는 아버지가 잘못된 것임을 친구들의 가족을 보며 조금씩 깨닫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모든 상황이 바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군대에 가있는 동안 통근버스 지입기사인 우리 아버지는 음주운전을 하다가 직원들의 신고로 경찰에 단속이 되어 면허가 취소되었다. 그런 나날들이 무한대로 반복이 되고 어머니의 빚은 점점 늘어만 가고, 더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당신이 생활비를 안줘서 어머니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어머니가 빚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여자가 과소비를 심하게 한다고 더 행패를 부렸다.
임계점은 다가왔고, 나는 어머니에게 아주 강력하게 이혼을 권고했다. 당시 가스라이팅이 심했던 권여사는 몇 번이나 망설였다. 그러다가 주변에서 여럿이 권유하고 당시 수험생이었던 동생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면서 결정을 내렸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1년동안 돈을 벌어서 집에 갖다줬다. 일을 더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을때 어머니가 더 일을 하면 학교졸업은 못 할것이라는 말에 학교로 돌아가서 졸업했다. 가뜩이나 취업이 잘 안되는 과인데, 취업준비가 잘 되어있을 리가 없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조금 더 방황을 해야 했다.
그 시절의 나는 부산사투리를 쓰는 모든 아버지뻘의 어른들을 경멸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장소가 바로 야구장이었다. 부산은 아버지의 땅이었고, 롯데는 아버지의 팀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롯데를 미워하는 마음이 휘발되어가는 것처럼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이 휘발되어 감을 느낀다. 때로는 아버지 안부가 그립기도 하고 연락도 하지만 아버지와 오랜 시간을 두고 살고 싶진 않다. 부산도 마찬가지로 이따금씩 그리운 추억들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역시나 살고 싶지는 않다. NC는 어떤 면에서 나의 해방구였는지도 모른다. NC가 롯데를 박살내는 장면을 보면서 아버지를 이겨먹은 듯한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빚은 수원으로 오면서 집을 팔아서 대충 청산했고, 이후 수원에서 온전히 갚았다.)
얼마전에 일을 마치고 <1984 최동원>(영화)을 보러 갔다. 걸면 걸리는 걸리버 간판이 인상적인 전주야구장을 지나 롯데백화점에서 봤다. 김시진과 이만수는 동원이가 살아있을때 더 자주 못보고 더 자주 연락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다. 롯데자이언츠를 볼 때마다 나는 자꾸 아버지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