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카게무샤는 예전에 봤었는데, 다음 작품인 란은 못봤다가 우연히 생각나서 DVD를 사서 봤다. 블루레이도 팔았는데 요즘 돈도 없고, DVD라 하더라도 플스3로 업스케일링 돌리면 720P 정도는 나오기에 DVD를 선택했다. 어차피 고전작품이기에 1080P나 720P나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정적인 장면에서는 업스케일링의 효과 때문인지 꽤나 만족스러웠으나 역동적인 전투장면에서는 그 한계가 뚜렷히 느껴졌다. 역시 완벽한 화면을 위해서는 블루레이를 사야 되는 것인가...
뭐 어쨌든. 보고 나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카에데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어떤 배우인지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하라다 미에코라는 배우였다. 이 영화가 80년대 중반 작품인만큼 지금은 중견배우가 되어있다. 이 배우의 연기 중 가장 압권인 장면은 둘째 아들을 유혹하기 위해, 한 테이크에서 슬픔과 분노, 그리고 유혹의 감정선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장면이었다.(카에데는 첫째 아들의 처로서, 이런저런 사연이 있다.) 근래에 본 그 어떤 여배우의 연기보다 압도적인 연기였다. 연기를 잘 몰라서 영화를 볼때 연기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안하는데 나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연기에 완전히 압도될 정도였다. 역시 일본의 여배우는 위대한 것인가.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각색한 영화이다. 이하 글에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일러를 피하려는 분은 알아서 피하시길.
※간략한 스토리는 접은 부분 참조.
영화의 주인공은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다이묘(지방영주)이다. 아들 3명과 가신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진을 치고 잠깐 쉬는 사이, 혼자서 사방을 헤매는 꿈을 꾼다. 다이묘(극중 이름은 히데토라, 이하 히데토라)는 꿈에서 깬 뒤, 자신이 오랫도록 계획해왔던 일을 시행하기로 마음 먹었다. 장성한 아들들에게 자기의 권력을 물려주고 자신은 편안히 노후를 맞이하는 일이다. 그 계획을 가신과 아들들에게 전한다. 당연히 가신들과 아들들은 반대하지만 그럼에도 자기의 의지를 밝히며 세 명이 힘을 합쳐서 나라를 잘 이끌어갈 것을 강권한다.
아들들은 마지못해 히데토라의 뜻을 받들기로 하지만, 셋째 아들은(이하 삼남) 결사코 반대한다. 히데토라가 물러나면 그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아들들이 싸우게 될 것이라 반대한다. 삼남은 말을 돌려서 하지못하고 직설적으로 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이 때로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삼남의 발언이 모욕적이라 생각한 아버지는 삼남을 바로 자신의 영지에서 추방한다. 추방당한 삼남은 자신에게 딸을 주기를 원하는 이웃영주이자 장인어른의 세력에 잠시 몸을 위탁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점령한 성이자, 가장 큰 성을 첫째 아들(이하 장남, 상징색은 노란색)에게 물려준 히데토라는 장남과의 불편한 동거에 들어간다. 각자의 세력이 있는데 완전한 권력을 원하는 장남에게 히데토라의 세력은 여전히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히데토라의 광대가 하는 농담에 격분한 장남의 세력과 히데토라의 세력이 성안에서 충돌하는데 그 과정에서 히데토라의 화살에 장남의 세력 중 한 명이 죽는 일이 발생한다. 장남은 히데토라에게 자신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했음을 증명하는 혈장을 요구하고 그 혈장에 서명한 히데토라는 배신감에 둘째 아들이(이하 차남) 있는 성으로 향한다.
차남(상징색은 붉은색)이 있는 성은 히데토라의 세력 중 두 번째로 큰 성이자, 두 번째로 점령한 성이다. 차남은 히데토라가 성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는다. 형의 명령이 있었다고 전하면서 히데토라의 세력이 다 들어올 수 없으며 히데토라 혼자만 들어오셔야 된다는 조건을 단다. 자기와 평생을 함께한 가신들을 버릴 수 없었던 히데토라는 결국 차남의 성도 포기하고 삼남(상징색은 파란색)에게 물려준 성이자 자신이 세력을 처음으로 일으켰던 성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 성안에는 삼남이 장인어른에게 몸을 위탁한 것을 안 사무라이들이 장인어른에게 달려가버려 마땅한 병력은 없는 상태였다. 간신히 히데토라의 세력이 삼남의 성을 장악했지만 병력은 많지 않았다.
배신감을 느낀 히데토라가 혹시나 세력을 모아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 두려웠던 장남과 차남은 아버지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히데토라가 있는 삼남의 성에 장남과 차남은 병력을 모아 공격한다. 히데토라는 몇 안되는 병사들로 저항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병사들은 모조리 참살되고, 히데토라를 지키던 충직한 가신들은 모두 죽어버린다. 더이상 희망이 없어지자 애첩들은 서로 자결하고 성은 불타서 주저앉는다. 여기서 옛날 일본영화의 근성이 보여지는데, CG나 미니어쳐세트가 아니라 실물세트로 구현한 성을 불태운다.
모든 것이 폭삭 무너져버린 혼란속에서 히데토라는 완전히 미쳐서 벌판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반면 히데토라의 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장남은 어디선가 날라온 흉탄에 목숨을 잃는다. 장남의 아내였던 카에데가 차남을 유혹하는 인상적인 장면도 이 다음에 나오는 장면이다. 한편 삼남은 아버지가 들판을 미쳐서 떠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장인어른의 병력을 빌려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직접 달려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차남세력과 전투가 벌어지게 되지만, 다행히 삼남은 마지막까지 히데토라의 곁을 지켰던 충직한 부하 탄고와 광대 쿄아미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무사히 구출한다.
때마침 정신이 돌아온 히데토라와 일단 몸을 피한뒤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돌아가려는 찰라, 어디선가 날라온 흉탄에 맞고 삼남은 말에서 떨어져 즉사한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차남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또 다른 이웃영주의 손에 죽는다. 이 모든 것의 배경에 흑막으로 카에데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 차남의 가신에 의해서 카에데는 살해당한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고 히데토라는 모든 것을 잃은 채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를 보고난 직후는 카에데 역을 맡은 배우에 대한 인상만 남았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났을까. 이 영화는 2차대전 이후 패망한 일본에 대한 메타포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영화는 장이모우 감독의 영웅처럼 색깔이 아주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는 영화다. 각 아들들은 고유한 색깔이 있고 각 세력들은 그 색의 군복을 입고 깃발을 달고 뛰어다닌다. 장남의 상징색은 노란색. 황제의 색이다. 차남의 상징색은 붉은색. 군인의 피의 색깔이다. 삼남의 상징색은 파란색. 아마 일본을 지켜주는 바다를 상징하지 않을까 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히데토라는 아마 일본의 민중을 의미할 것이다. 황제와 군인에게 자신의 모든 권력을 위임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 민중은 결국 황제와 군대에게 배신당한다. 마치 히데토라처럼 말이다. 장남이 차남의 세력이 쏜 것으로 보이는 총알에 맞아 죽는다는 것도 군대에 의해 무력화된 일본왕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제일 작은 삼남의 성에서 점점 큰 성을 점령해 나가는 과정도 여러모로 근대이후 일본의 팽창과 닮았다. 맨 처음 기반을 만든 삼남의 성이 현재 일본 본토라면 차남의 성은 아마 한반도와 오키나와와 타이완, 장남의 성은 중국대륙과 태평양 일대가 될 것이다.
장남과 차남의 공격으로 성이 통째로 불타오르는 장면은 여러모로 원폭의 모습이 떠오른다. 불기둥을 내뿜으며 무너져내리는 성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눈빛으로 내려오는 히데토라의 모습에서 원폭을 맞은 일본 민중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런 면에서 카에데는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당한 모든 이의 원한을 의미한다. 카에데의 원한이 히데토라 일가를 완전히 박살내버린 것처럼, 일본도 그 희생당한 모든 이의 원한으로 무너져내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광대 쿄아미는 부처의 자비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 울부짖지만 부처의 자비도 인간이 지은 죄의 업보를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버려진 불화의 모습은 부처도 인간이 지은 죄의 업보는 구원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자신의 마지막 시대극으로 란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1910년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의 급속한 팽창과 패망을 지켜보고 겪어왔던 인물로서 어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본제국의 폭압적인 식민지배를 당한바 있는 나로서 꽤나 불쾌한 영화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잘못은 일본군이 했구요, 일본 정치가가 했구요, 일본 왕이 했구요 하는 보통의 일본민중이 가지는 피해의식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녕 일본제국의 폭압적인 식민지배에 일본민중의 지분은 단 1도 없는가.
구로사와 아키라는 반전영화를 남기려고 했던 것 같지만, 단지 일본민중이 보기에만 그럴싸한 내용의 반전영화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