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비로부터 시덥잖은 문자가 하나 왔다. 항상 악마는 마지막 순간에 나에게 속삭여서 평정심을 잃게 만든다.
C사 영업직의 채용과정은 길었다. 음악오디션 프로그램 방식의 채용이라나 뭐라나... 최종면접에서 똑하고 떨어지고 나니, 대부분의 기업에서 채용이 끝나 있었다. 사실 나는 대학원이 가고 싶었다. 이리된 거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것으로 목표를 바꿀까 생각하던 차였다. 그때 울산에 살던 아비가 아들 보고 싶다고 부산에 왔다. 권여사는 이혼한 이후라 알아서 만나보라 했고 나는 대학원에 가게 되면 지원이 필요했던 터라 대신동 삼익아파트 근처에 있는 호프집에서 아비와 맥주를 먹었다.
아비는 나에게 뭐할거냐 물었고, 나는 여러가지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원도 생각 중이고 스펙을 더 쌓아서 취업을 할까도 생각중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비는 니 나이가 몇 살이고? 했고 나는 28살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비가 나는 임마 나이가 55살인데 또 이번에 자격증 하나 땄다 아이가, 굴삭기 자격증 있쟤, 이번에는 로다 자격증도 땄다 아이가, 니는 자격증 뭐있드노? 하고 물었다. 저는 자격증 없지요, 영어점수만 조금 있고... 그러자 아비가 니는 대학도 졸업한 놈이 언제까지 놀고 있을래? 나는 이리 나이를 먹어도 자격증 여러 개 따고 다닌다, 니는 자격증도 하나 없어서 뭐해갖고 먹고 살래? 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사실 대학원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서울 쪽에서 다녀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좀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아비는 대뜸 화를 내더니, 대학교 나왔으면 됐지 대학원은 무슨 대학원이냐고 역성을 냈다.
그 말에 조금 짜증도 났었던 것 같고, 여러 번 채용에서 미끄러지니 지쳐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고용센터에서 추천해준 기술훈련원에 등록해서 전기기능사 자격을 땄다. 그리고 천안에 있는 한 공장에 전기관련 기술직으로 취업을 했다.
천안은 완전한 무연고였다. 천안의 공장 앞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었고, 공장 옆 작은 마을에는 3~4가구가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온통 논과 밭이 있었고 한가운데 공장만 덩그러니 있었다. 일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면 정말 심심한 일상이었다. 공장을 나와 논과 밭을 차로 한 10여분정도를 나가면 작은 번화가가 하나 나오는데, 거기있는 파리바게뜨와 짬뽕과 병천순대를 먹는 것이 일상의 작은 행복이었다.
그러다가 주말에는 빵과 짬뽕과 순대를 먹는 일도 심심해져 정말 해본 적이 별로 없는 혼자 영화보기를 하게 되었다. 그때 천안 야우리시네마에서 본 게 라이프 오브 파이였다. 그 영화를 보고 머리에 망치를 맞은 것처럼 띵해졌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정말 영화를 많이 보기 시작한 시점은.
그렇게 영화를 하나 둘씩 보다가 어느 순간 이렇게 본 영화들을 멤버십으로 포인트를 쌓으면 꽤 될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포인트를 또 쌓다보니 CGV멤버쉽에서 최고등급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CGV멤버쉽에서 최고 등급을 달성하지 못했다. CGV멤버쉽에서 최고등급이 처음에는 VIP등급 하나만 있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 VIP등급위에 VVIP등급을 만들었고, VIP와 VVIP 사이에 RVIP등급을 만들고 VVIP 위에 SVIP등급을 만들었다. 최고등급을 달성할려고 하면 또 등급하나가 생겼고, 또 달성될 시점이 되면 또 등급이 하나가 생겼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최고등급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아마 CGV에서 AVIP에서 ZVIP까지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극장에서 영화를 1년에 몇 편 정도 보나 했더니, 나의 경우는 30편 가까이 보고 있는 중이다. 2회차 관람한 것도 있을테니 순수 영화 편수만 따지면 25~30편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외로워서 혼자 영화보기를 시작했고, 그렇게 시작하게 되니 비교적으로 외로울 때나, 외롭지 않을때나 영화를 계속 꾸준하게 보고 있는 중이다.
COVID 팬데믹 전인 2019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1인당 영화관람 횟수는 4.37회로 세계에서 가장 영화를 많이 보는 나라라고 알고 있다. 사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외로운 나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