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릴테이프였다. 닉슨과 키신저의 통화기록이었다. 닉슨은 국민들에게 베트남에서 나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통화내용은 달랐다. 닉슨도 베트남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키신저와의 통화에서 캄보디아 침공이 불가피하다고 이야기했다. 그 통화가 끝난후, 정부의 공식발표없이 미군은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거기서 또다른 미군이 희생되었다. (PBS제작 10부작 다큐멘터리, '베트남전쟁' - netflix에서 볼 수 있음)
나라기록관의 멋진 시설을 바라보며 느낀 것은 만약 전두환의 통화기록이 하나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광주의 누군가가 북한에서 잠입한 특수부대가 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요, 살아남은 죄로 기억의 감옥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일부 국회의원들의 쓸데없는 소리에 상처입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허름한 릴테이프 하나만 던질 수 있었다면...
원장님께서 견학온 대학원생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은 나라기록관이 개관하던 날의 풍경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봉안의식을 이어받아 다시 국가의 기록을 바로 잡겠다는 의식이 새롭게 다가왔다. 조선은 숙종-영조-정조 시대까지만 해도 세계적으로 봐도 괜찮은 수준의 국가였다. 왕이 왕답지 못하고, 재상이 재상답지 못해 잠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았겼지만 결코 일본 따위가 지배할 수준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렇게 나라기록관이 개관하고 우리의 기록문화는 한단계 나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록입국의 길은 멀다. 나는 기본적으로 기록의 관리는 그 기록이 만들어진 지역에서 보존되고 활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겨울 대구찜이 먹고 싶었다. 매년 12월이면 용원-가덕항에서 대구찜을 먹곤 했다. 그런데 수원에서 먹은 대구찜은 그 대구찜의 맛이 아니었다. 푸석했다. 입안에서 터지는 대구살의 쫄깃한 향미는 용원-가덕항의 그것과 수원의 그것은 천지차이가 있었다. (용원-가덕항은 예전에는 같이 웅천군-진해시 소속이었으나 1989년부터 가덕항은 부산직할시로 편입되었다. 용원은 2010년 창원, 진해, 마산 통합으로 경상남도 창원시로 편입되었다.)
기록도 대구찜과 마찬가지로 무릇 그 지역에 있어야 진정한 향미를 발휘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50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기초자치단체 수준까지 영구기록물 관리기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지방자치법 제 10조 2호에 따르면 도가 처리하는 사무의 일부를 직접 처리할 수 있다.) 앞으로 전국에 들어설 영구기록물 관리기관의 설립과 운영에 나라기록관의 노하우가 소개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ICA 총회를 통해 진흥법을 만들려고 했던 시도의 좌절은 못내 아쉬웠다. ICA 총회를 개최하지 말고 최순실이에게 말 한마리를 사줬다면 어땠을까? 최순실이에게는 기록학계의 올림픽이라 할 수 있는 ICA 총회보다 정유라 말 한마리가 더 소중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