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티나 도이힐러, 이훈상, 「신유학 수용전의 과거 : 고려」,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 이카넷, 2003
고려가 건국되고 나서 고려 초기의 국왕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 주로 당의 제도를 모범으로 삼아서 도입하려 했다. 그렇지만 당나라 문화가 아무리 강하고 호소력이 있다 하더라도, 한국 사회와 중국 사회 사이에서의 본질적인 상이함 때문에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한반도에 이식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고려왕조에서 상층 사회 계급의 획득과 유지는 귀속과 성취의 균형 위에서 좌우되었다. 처음에는 출생과 세습만이 귀족에 속하느냐의 여부를 결정하는 주요한 조건이었다. 국가 기구가 점차 관료화함에 따라 인물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과거시험에서 입증된 능력과 지식을 우선으로 하게 되면서, 관직이 위세의 새로운 근원이 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유교 교육은 고려 귀족들의 관직 생활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과거제의 시행에 의한 바가 크다.
고려는 장기간 수명을 유지한 ‘왕조’였다. 중국기간에 왕조가 두 번 바뀌는 동안에 존속했던 긴 왕조였기 때문에 고려를 통과하는 일관된 특징은 거의 없다. 따라서 고려 사회 전체를 일반화하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기존에 남겨진 사료가 주로 고려 엘리트들의 사회에 대한 사료이기 때문에, 우리는 고려 엘리트 사회에 대한 고찰을 시작해보려 할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고려 사회에 대한 재구성이 어떠한 것이라도 일시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연구의 목적도 고려 엘리트 사회가 뒤이은 조선시대의 것과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입증하는 것을 성공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친족과 출계
고려의 친족 용어를 살펴보면 인상적인 부분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형제들 모두에게는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데에 반해서, 어머니의 남자 형제들에게는 개별적인 용어가 부여된다는 점이다. 이와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이 당나라에서 도입된 오복제의 변형이다. 당나라의 경우에는 외조부의 애도기간을 5개월로 정해놓은 반면, 고려의 경우 1년으로 규정하여서 증조부와 똑같이 경의를 표하였다. 또한 외조부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남자형제들과 자매들 역시 당나라의 모델에 규정된 것보다 높은 등급을 부여하였다.
또한 한국의 상피제와 같은 경우에는 부변친과 모변친 사이에서 거의 완벽한 균형을 보여주고 있어서 중국의 원형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즉, 한국인들은 중국인들과는 달리 외족과 처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중국의 부계 편향을 그다지 중시하지는 않았다.
족(族)이라는 글자자체도 중국에서 쓰이는 것과 차이를 보이는데, 중국에서는 종종 본족, 외족, 처족 이렇게 삼족으로 세분되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의 족은 융통성 있고 일체를 포함하는 친족 관계의 개념을 기초로 하여 성립된 것이었다.
고려 초기에 과거시험에 응시하려면 자기가 인정받는 출계집단의 구성원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 12세기 중반에 들어서자 계보 기록이 좀 더 정교해지기 시작한다. 이른바 사조(四祖)라는 것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중국으로부터 전해졌을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사조에 외조를 포함시킨 것이다. (사조는 부, 조부, 증조부, 그리고 외조로 구성되었다.) 이 사조는 더 정교한 방향으로 발전하여 이른바 ‘팔조’를 형성하게 된다. 이 팔조에는 어머니쪽 출계는 더 이상 계산하지 않고, 아버지쪽 출계를 더 집어넣으면서 분명히 부계적인 방향으로 편향되게 되었다. 이것은 고려 사회 후기에 중국의 부계적 사회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계승과 상속
고려왕조 대부분의 기간에, 출계를 부모 어느 한쪽의 계통만으로는 분명하게 추적하지 못하며, 개인의 사회 지위를 규정하는데 부와 모, 양변을 고려대상으로 삼았다. 계승에 있어서 어느 확고한 법칙이 없었기에 고려 초기에 거대한 방계 속에서 형제들끼리의 다툼이 발생하기도 했다. 실제로 고려왕조 초기에 왕권을 둘러싸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를 방지하기위해 태조는 당나라의 계승 규칙에 담긴 부계 원리를 제도화하려 했지만, 실제로 왕위는 형제, 아들, 조카들 사이에서 종종 세대의 방식을 무시한 채 일정한 방식이 없이 양도되었다. 음서와 같은 경우에도, 아버지쪽 또는 어머니쪽의 선조, 이들 양자를 다 인정했었다. 또한 외족과 처족들도 계승자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인정되었다. 분명 조상을 중심으로 한 계통을 강조하는 것은 당나라 모델에서 따온 것이지만, 외손을 추가한 것은 고려의 관행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정과 공음전시와 같은 경우에도 남성 지향적이고 계통에 기초를 둔 당나라 법규 속에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여성까지도 인정을 하는 전통을 넣어두려고 했었다. 여성은 공음전시를 받을 수는 없었지만, 남편과 아들을 통하여서 토지에 대한 몫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유재산의 상속은 국가에서 부과하는 계승 규범과는 다른 그 자체의 절차를 따랐다. 본질적으로 소유주의 상속자는 여자든 남자든 모두가, 수대에 걸쳐 모아 온 ‘조상전래의 토지’의 배분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재산상속도 여자형제들까지 포함하는 형태로 동등하게 이루어졌다. 토지는 많았지만, 경작할 인구가 많이 부족했던 당시 현실 속에서 많은 세대가 같이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해야했기에 공동 세대를 유지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균분 상속은 형제자매들을 강력하게 결속시켜, 공동 세대를 되도록 손상하지 않고 유지하는 좋은 실마리가 되었다. 여성에게도 재산이 상속되었지만, 그 재산이 남편의 가문으로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기혼여성이 자식 없이 사망하였을 경우, 그 재산은 남편의 가문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친정가문의 재산으로 환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혼인의 사회 정치적 측면
고려시대의 결혼 관습 중 다분히 특징적인 면이 바로 근친혼이었다. 왕실은 국왕 혈통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왕실 출신의 여자를 다른 가문과 결혼하도록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여기에 단순히 국왕 혈통의 우월함을 지키기만을 위해서 근친혼이 성행하였다고는 보지 않는다. 외가쪽 계통까지도 계승권을 인정하는 당시 상황을 생각한다면, 고려왕실의 여성들이 다른 가문들과 결혼했을 때, 왕실을 위협하는 강력한 외척 세력이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태조는 바로 그런 점들을 우려하지 않았을까 하는 게 바로 내 생각이다.) 13세기 후반에 몽골이 고려를 지배하면서, 왕실 혈통의 여성이 자신의 친족들과 결혼하는 고려의 전통적인 정책은 포기되었고 몽골의 지배자들과 공주는 교환되었다. 그제야 근친혼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규제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근친혼이라는 것은 왕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고려 초기에는 근친혼이 왕실에서만 전형적인 것이 아니라 상층 계급에서도 만연된 관행이었으며, 아마도 평민계급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려시대 혼인의 제도적 측면
고려시대 혼인의 가장 특징적인 거주 형태는, 바로 처가거주제도였다. 결혼을 하면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옮겨갔고 아들 또는 손자까지도 종종 처가에서 낳고 성장하였다. 이런 제도가 압도적으로 매력을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고려 여성들이 누린 유리한 경제적 지위에 바탕이 있다. 고려 여성들은 남자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상속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여성과 결혼한 남편이 처가에 들어온다고 해서 그것이 가문에 손해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각 세대에서는 딸과 자매를 잃어버리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남자 구성원이 들어옴으로 인해서 정치적 또는 사회적으로 이익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위는 남성 후계자가 없는 세대에서 종종 아들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엘리트의 딸들은 자신들의 남자 형제와 같이 음서의 특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남편은 할 수 있었다. 고려 시대의 처가거주제도는 일정부분 실리적인 부분이 있었다고 보인다. 남편은 처가에 거주하면서 처가에서 나오는 경제적인 이득과 배경을 습득할 수 있었으며 친정은 새로운 남자구성원을 획득함으로써 그에 따른 사회적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에서는 부인을 여러 명 거느릴 수 있었다. 중혼은 고려왕실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남자가 부인을 한 명 이상 데리고 사는 것은 결혼한 여성들이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가능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친정에서 자신이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경제권이 있었기 때문에 생계의 위협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과 살 수 없었던 경우에는 자유롭게 남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다수 중혼 가정의 경우에 부인들은 떨어져 산 것 같으며, 추측컨대 종종 자신들의 친정 가족과 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편은 부인을 방문하는 형태로 결혼생활이 이루어졌다. 당시 결혼의 해체는 처가살이에서는 흔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처가살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권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혼의 경우에는 일시적인 계약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중혼의 경우에는 성격이 조금만 다를 경우에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이혼이 성립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독자적인 상속권을 가진다는 것은, 법적으로는 대등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경제적으로는 대등한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으로 동등했던 여성의 위치는 일방적으로 여성을 남성종속적인 존재로 판단했던 중국의 시각과는 차이가 있었으며, 여성의 이혼은 사회적 비난대상이 아니었고, 재혼도 손쉽게 할 수 있었다. 분명히 법은 ‘정절을 지킨’ 여성에 대한 포상을 하고 있지만, 이것자체가 그 당시 ‘정절’을 지킨 여성이 얼마나 드물었는지 잘 나타내는 지표로 보인다.
상장례
오복제도는 985년에 고려로 들어왔는데, 이 시기는 성종이 주요한 문화 제도를 야심차게 중국화 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들여온 중국 이론을 한국 현실에 적용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랐는데, 상복의 법규가 기껏해야 관직을 점유한 수도의 엘리트들에만 해당하는 규범으로 간주되었을 뿐 나머지 대부분은 원래의 관행에 집착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중국의 오복제는 고려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일정부분이 고려에 맞게끔 수정되는데 이러한 수정자체가 고려 사회의 주요한 특성을 반영하려는 의식적인 시도로 보인다. 고려의 오복제는 외족과 처족들에 대한 사회적 중요성을 표현하면서, 고려의 독특한 특징을 획득했다. 사실 중국의 오복제는 고려의 친족체계에 적용하는 것이 본래부터 적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국의 오복제는 매우 부계적 편향에 구조적으로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관직을 차지한 귀족들도 오복제도를 이상적인 것으로 존중했지만, 실제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규칙을 바꾸었다. 이들이 오복제도에서 규정한 대로 백일 이상 상복을 입는 일은 드물었다. 평민에 불과한 군인들의 경우에는 처음엔 백일을 허용하였지만, 나중에는 50일로 깎였으며 실제로 상을 치르는 날은 25일정도로 축소되기도 하였다.
장례를 치르는 데에 있어서도 시체를 관에 묻어 땅에 매장하는 것이 규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화장하여 사찰에 안치하였다가 땅에 묻었으며, 이는 화장이 천상에서의 삶을 지속시키며 서방 정토로 들어가는 일을 촉진시킨다고 믿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결론 : 다시 생각해본 고려 사회
고려사회는 가문이 굉장히 중요했던 사회였다. 철저하게 계급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자신이 어느 가문에 속해있는가가 출세의 중요한 요건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이런 가문 속에는 부변적 출계뿐만이 아니라 모계적 출계까지 포함하였고, 고려의 사람들은 양변 친속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또한 고려의 여성들도 남자형제들과 대등한 경제권을 가짐으로서 그 이후 조선사회보다도 훨씬 힘이 있었다. 이런 고려시대 사회생활의 모습은 전형적인 공계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실은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유입된 부계 지향의 법제화를 이룩하려고 하였다. 물론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괴리가 발생하듯이, 중국의 제도를 완벽히 고려사회에 이식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법적인 시도가 고려사회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기제가 된 것은 확실하다. 이러한 점층적인 변화가 이다음 왕조인 조선사회가 중국식 부계편향적 사회로 개편될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세기동안 고려사회는 그 성격이 점차 바뀌었다. 중국식 부계철학위에 공계적인 한국적 전통이 덧붙인 것이다. 그 결과는 전통 한국체제가 개인과 그 집단에 부여하는 선택의 폭을 축소시켰다. 위로부터 추진된 중국식 개편작업은 정부에 몸담고 있는 엘리트 계층의 공적 영역에 영향을 준 것이다. 반면 귀족들의 사적 생활에는 거의 뚫지 못하였고, 사회의 하위계층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왕조 말기에 신유학이 도래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해주었고, 때맞춰 한국 사회가 부계적 변환을 완결한 것은 바로 이 신유학 이데올로기의 추진력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