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대학교 사학과 2008년 제주도 역사기행 자료집 中에서...
일제시기 제주의 역사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일제식민통치에 의해서 민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는 가운데, 제주민중이 거기에 대해 저항하고 또 스스로 살 길을 개척해온 역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일제는 한반도 전체를 수탈하기 위해, 더 많은 힘과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제주도도 다른 지역 못지않은 수탈을 당하였다. 거기에 추가적으로 제주도만이 가진 특수한 상황이 겹쳐지면서 일제식민통치의 수탈은 더 가혹하게 제주민중에게 적용되었다.
원래부터 제주도는 토지가 굉장히 척박하여, 소출이 많이 나는 지역이 아니었다. 그런데다 토지조사사업의 영향으로 빈농들이 농토를 잃어가는 가운데, 화전경작금지 규제는 화전으로 간신히 먹고 살던 화전민들의 삶의 터전을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 그와 동시에 일제의 상품을 비싸게 팔아먹기 위해 시장이 설치되었는데, 이렇게 설치된 근대적 시장경제체제는 농업생산력이 극히 낮았던 제주도민들의 삶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제주도민들은 제주도내에서는 생활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고향을 버리고 타지로 진출하여 간신히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이들의 타지진출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해외에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1923년에는 오사카와의 직항로가 개설되면서 제주도민들은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이들에 의해서 오사카에서 항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제주도민들의 삶은 절대적 빈곤에서 크게 향상되지 못하는 가운데, 일제에 의한 수탈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수탈에 제주도민들은 끊임없이 저항했다. 1920년대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항일운동은 사회주의 청년운동가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1925년에는 신인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들이 30년대 중반 지하로 들어가기까지 도내항일운동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기 절정을 이룬 것은 해녀투쟁이었는데 1931~1932년 연인원 1만 7000명이 참여하고 70여명이 검거된 제주도 해녀투쟁은 제주도 최대의 항일투쟁이었고, 우리나라 최대의 여성운동, 어민투쟁이었다.
1. 일제시기 제주의 사회 · 경제적 상황
제주도의 전근대 시기 주요산업은 농업과 어업이었다. 농업은 소출이 많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정수준의 생산을 해내고 있었는데, 기존의 농토 외에도 목축을 했던 땅에 대해서도 화전경작의 형태로 농사가 이루어졌다. 또한 섬이라는 지역의 특색을 통해 어업도 일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빈약한 형태였지만 공업생산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옹기, 기와 및 괭이 등의 온기구와 기타 철제공업 및 가내수공업 규모의 삼베, 죽세공, 머리빗 등이 생산되었다. 이러한 공업생산은 많은 생산이 가능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급할 정도는 생산을 하고 있었다. 이랬던 상황이 일제시기에 접어들면서 차츰 변화하게 된다.
농업에 치중하고 있던 사회 · 경제적 구조가 변화하게 되는데,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상공업 및 기타직종에 종사하는 인구가 증가하고 그 결과로 이전보다는 상대적으로 다양하고 세분화된 직업구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인에 의해서 갖가지 근대적인 시설들이 갖추어지고 가동되기 시작하는데, 축산물 및 수산물을 원료로 하는 통조림, 패구 등의 제조업과 제주도에서 수요가 늘어나고 있던 양말, 양조 등의 제조업이 시행되었다. 특히 만주사변 이후에는 통조림에 대한 군의 수요가 증가하여 통조림 제조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제조업 분야로 국한된 고용의 한계는 도민의 생존방식을 크게 변화시키지 못하였고 또한 당시 수산자원의 고갈에 따른 어업의 침체 등의 영향으로 도민은 새로운 생존방식을 찾아 타지로의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섬에서 이루어지던 전통적인 수산업은 근대화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근대화된 수산업은 곧 일본인에게 귀속되고 말았다. 또한 대다수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토지를 박탈당하였으며, 토지를 지켜낸 다른 사람들도 토지세를 갚기 위해 가산을 팔아야 했다. 섬 전체가 절대적 빈곤상태에 빠져드는 가운데, 제주도내 자체적인 생산력으로는 도저히 생활해낼 수가 없었다.
1923년에 오사카와의 직항로가 개설되자, 많은 제주도민들이 가난과 절대적 빈곤상태에서 탈피하기 위해 대거 일본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1935년까지 무려 5만여 명의 제주도민들이 일본으로 이주하여 직물, 광산, 수산업에 낮은 임금으로 노동을 하였고, 지속적으로 많은 수의 제주도민들이 도일하였다.
그와 동시에 일제에 의한 수탈도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시기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은 한반도 전체가 수탈을 받고 각종 억압과 탄압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제주도에서도 이러한 식민통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토지에 대한 수탈이 이루어졌는데,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하여 제주도내의 역둔토 및 민간지 등을 수탈하였다. 또한 누에고치, 면화 및 어장 등의 생산물에 대한 수탈도 계속 이루어졌으며, 해방직전에 이르러서는 제주도를 군사요새화하면서 도민의 노동력을 수탈하였다. 동시에 일제는 이러한 수탈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제주도의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도제를 실시하고 행정권과 사법권을 독점한 도사를 파견하여 제주 민중을 철저히 억압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제주도민들은 살 길을 찾아서 타지로 진출하기도 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일제에 저항하여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2. 일제시기 제주민중의 항일 투쟁
제주민중들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하여 계속하여 저항하였는데, 그것이 여러 가지의 투쟁으로 나타났다. 1909년에는 제주의병투쟁이 일어났었고, 1918년에는 법정사 항일투쟁과 같은 무장봉기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제주도에서도 조천만세시위가 전개되었지만, 이 시위가 많은 호응을 받아서 제주도 전역으로 뻗어나간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1920년대에 이르러 제주도에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고, 민족주의 인사들이 급속도로 개량화 경향을 보이면서 제주도의 항일운동은 사회주의자의 주도로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제주도에 사회주의사상이 유입된 후, 야체이카조직이 결성되었다. 이 야체이카조직이 등장하고, 또 각종 항일운동을 지도하면서 항일운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야체이카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민중항일운동이 계획되고 전개되었던 시기는 1920년대 말~1930년대 초까지이다. 그런 와중에 터진 원산총파업은 전국의 대중에게 크나큰 자극을 주었고, 제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1929년에는 항만 노동자에 대한 일본인 감독의 폭행사건을 계기로 ‘산지항만 노동자운동’이 진행되었다. 그때 당시 제주도에 부임한 마에다는 제주도의 중추항구인 산지항을 개수, 확장할 것을 결의하였고, 그에 따라 60만원의 자금과 100여명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동원된 노동자들 중의 일부는 독서회 등을 통하여 사회주의사상을 학습하고 있었던 관계로 반일 의식이 높았고, 이때 일본 등의 지도하에 ‘구타 반대’, ‘최저생활 보장’, ‘임금 인상’, ‘조합조직’, ‘신간 단축’ 등의 경제적 요구를 내걸고 총파업에 돌입하여 수십일 간 투쟁한 결과, 그들의 요구를 관철하는데 성공하였다.
1931년 11월에서 1932년 1월 말까지 해녀투쟁이 폭발하였는데, 이 투쟁으로 제주도내의 항일운동은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해녀조합은 조합장을 일본인 도사가 겸임했었고, 또한 지정판매제 등과 같은 불합리한 수탈구조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발하여 해녀들의 시위가 세화리를 비롯한 곳곳에서 이루어지자 신임도사인 다구치와의 협상이 추진되었다. 1월 12일, 해녀 1000여명이 모여서 2차 데모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세화주재소에서 협상이 이루어지는데, 다구치는 해녀들이 요구한 ‘일제의 지정판매 절대반대’ 등 12개의 요구조건을 5일안에 실현할 것을 약속하게 된다.
1월 24일 일제 관헌에서는 해녀들의 배후로 ‘민중운동협의회’가 있다고 지목하여 비밀결사의 구성원을 구속하는 등 각지에서 청년들을 검거하였다. 이 속에는 청년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춘화ㆍ김옥련 등과 같은 주동 해녀 20여명도 포함되어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해녀 500여명이 동료 해녀를 구출하기 위하여 세화주재소를 습격하여 검거자들을 탈환하였다. 해녀들은 이들을 우도로 피신하였는데 경찰대가 우도에 나가 이들을 체포하였다. 경찰대가 배를 타는 순간 우도 해녀 800여명이 경찰대를 포위하여 잡혀가는 해녀를 구출하려 했다. 그러자 경찰 측에서 공포를 발포하여 진압하였다. 그 이후에도 청년들의 연행은 계속 이어져서 최종적으로는 남자 43명, 여자 35명 모두 78명이 검거되었다.
해녀투쟁은 신분적인 천시와 함께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려 온 해녀들이 생존권 확보를 위해 저항했던 투쟁이었다.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던 1개월간에는 무려 1만여 명이 참가하였는데, 이는 1930년대 어업노동자들의 대표적인 투쟁이었다.
이외에도 제주민중들은 여러 가지 항일투쟁을 전개해나가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계속 저항하였다. 일제는 격렬한 항일투쟁들을 빌미로 제주도내의 반일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제주도의 반일투쟁 세력은 다시 혹독한 시련의 세월을 겪으면서 지하로 잠입해야만 했다.
참고문헌
염인호, 「일제하 제주도의 사회주의 운동의 방향전환과 제주 야체이카 사건」, 『한국사연구』 70, 1990.
임하경, 「해방전후 제주상황과 4.3항쟁」, 원광대학교, 2002.
한국브리태니커백과사전, 「제주해녀조합사건」,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