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 연휴 동안 디워를 봤다.
보고 나서 이 영화가 왜 미국에서 흥행을 하지 못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느 영화나 어느 소설에서나 가장 중요한 기본이 되는 것은 주인공의 ‘행동’이다. 주인공이 그냥 가만히 앉아있다거나 집에 누워 잠만 잔다면 그건 영화나 소설이 결코 될 수 없다. 영화나 소설이 되려면 그 매체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며, 그 행동들이 바로 영화의 주된 내용이 된다. (그리고 그 ‘행동’들과 그 ‘행동’ 이후 도출되는 결과를 통해서 그 영화나 소설을 만든 제작자는 어떤 메시지를 삽입하기도 한다.)
주인공이 이러한 ‘행동’을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부여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동기부여’이다. 흥행한 영화 속 주인공이 하는 ‘행동’에 관객들이 쉽게 동화되는 이유는 그 주인공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이 화면 속에서 비춰지는 행동들에 공감이 가고 몰입이 되면서 그에 따라 감동을 얻기도 하고,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극에서든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동기부여’의 설정은 매우 중요하다. ‘동기부여’는 주인공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에 충분히 관객의 공감을 살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성공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장동건은 전쟁터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다. 장동건은 왜 그렇게 전쟁터에서 영웅적으로 싸우는가? 그건 바로 동생인 원빈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동기부여’는 가족에 대한 강한 연대감을 가진 한국 관객들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결국 한국시장에서 성공했다.
만약, 『태극기 휘날리며』가 형제애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나라에서 개봉했더라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관객들은 2시간 내내 장동건이 왜 저렇게 전쟁터에서 날아다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별다른 감동도 느끼지 못하고 극장 문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에 이런 글을 남길 것이다.
“2시간 동안 나에게 감동을 준 것은 오직 잘생긴 두 한국 배우의 얼굴뿐이었다.” (어쩌면 걔들 기준으로 장동건과 원빈은 잘생긴 얼굴이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라크의 수니파와 시아파와의 갈등을 다룬 이라크만의 특수한 상황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한다면, 그 영화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절대 성공할 수 없다.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휴머니즘에 대한 이야기라면 또 다르겠지만.)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감동을 느끼지 않는다. 결코 공감할 수 없는 것에 재미를 느끼지 않는다. 이해 없는 공감은 있을 수 없고, 공감 없는 흥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어느 영화가 어느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관건은 바로 그 영화가 그 시장 관객에게 얼마나 ‘통하였느냐’는 것이다.
『디 워』는 한국 시장에서 관객들과 통하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애국심 마케팅이니 뭐니, 말들이 참 많았었지만, 작년 『디 워』가 기록한 스코어는 단순한 논란의 힘으로 보기에는 좀 어폐가 있다. 영화 자체가 가진 어느 정도의 재미가 있었기에 그 정도 스코어가 가능했으리라 본다.
하지만 미국시장은 얘기가 다르다. 『디 워』는 용이 되려는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싸우는 과정을 다룬다. 미국인들이 과연 동양의 ‘용’이 가지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은 지금 화면에 펼쳐지는 이무기의 모습도 충분히 강력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굳이 (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용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이무기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그런 이무기의 모습을 이해 할 수 있었을까?'용'이 되지 않은 '이무기'의 힘도 충분히 강력하다. 근데 굳이 용이 될 필요가 있을까?이무기는 여의주를 찾아야 한다. 왜 여의주를 찾아야 하지? 용이 되기 위해서.
그래도, 한가지 고무적인 것은 그의 영화가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 원본 출처 : 네이버 영화 /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95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