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31 추가) ※ 스포일러 있습니다.
얼마전 신세기 에반게리온 TV판의 극장판인 엔드오브에바가 메가박스에서 단독으로 상영되었다. 에반게리온은 TV판이 1996년 방영되었고 극장판인 엔드오브에바가 1997년 상영되었는데, 당시 일본문화가 개방되지 않은터라 엔드오브에바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엔드오브에바를 보고 왔는데, 영화를 본 이후 하루종일 우울하고 불쾌했다. 일본에서 개봉당시에 이것을 본 사람들은 여러모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것 같다. 대충 이야기를 알고 있는 나도 이런데 당시 아무 정보도 없이 극장을 찾은 오타쿠들은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당시 안노 히데아키는 30대였던 걸로 알고 있는데 신체적으로 절정에 있는 크리에이터가 자신의 우울증과 최고의 기술을 가진 애니메이터 집단이 뭉쳤을 때 나오는 어마어마한 무엇인가를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보러가기 전에 에반게리온 TV판과 신극장판의 파를 조금씩 돌려서 봤다. 그리고 엔드오브에바를 봤는데 안노는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프랜차이즈를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신극장판도 이야기를 따져보면 Q와 4만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라 할 수 있고, 서와 파는 TV판과 엔드오브에바와 이야기가 많이 겹친다. TV판 24화에서 마지막 사도인 나기사 카오루가 제거되는데, 엔드오브에바는 토사구팽격으로 사도를 모두 퇴치한 다음에 쓸모가 없어진 네르프를 제레가 공격하면서 전개된다. 그리고 미사토가 죽고 이른바 꿈도 희망도 없는 엔딩으로 달려가는데, 제레가 네르프를 공격한다는 것을 모종의 이유로 미리 알게된 신극장판의 겐도가 파에서 서드임팩트를 먼저 일으키고 그것의 뒷 이야기가 Q와 4에서 전개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추론인 듯 하다.
에바를 처음 본다면 TV판의 24화까지 보고 엔드오브에바를 본 다음, 서드임팩트로 인간이 다 융해가 된 상태에서의 이야기를 TV판의 25, 26화로 보고 그 다음에 신극장판의 서는 제끼고, 파부터 Q, 4를 차례대로 보는 것이 가장 재미있게 보는 방법인 것 같다. 안노는 그냥 루프물로 신극장판을 만든 것 같다.
신극장판 4편을 만드는 중 제작된 다큐멘터리인 안녕, 모든 에반게리온(왓챠공개중)을 보면 마지막 순간에 안노의 변덕으로 내용을 갈아엎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아마 루프물임이 부정되었던 것 같다.
안노 히데아키는 신극장판 4편을 만들고 더 이상 에반게리온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안노는 또 에반게리온을 만들 것 같다. 다만 다양한 이야기와 디자인을 가진 에반게리온을 봤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의 재능을 에반게리온으로만 보는 것은 분명한 재능의 낭비니까.
(2021-09-06 원문)
마침표. 때로는 마침표를 찍어야할 순간이 온다. 나에게 있어 에반게리온이라는 애니메이션은 그런 마침표의 대상이다. 인생을 지나가는 순간마다 이따금씩 다시 들여다보는데 그럴때마다 안좋은 쪽으로 감상이 달라지는 신기한 컨텐츠이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은 대개 좋은 쪽으로 감상이 달라진다.)
에반게리온의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 사다모토 요시유키는 나쁜 놈이다. 그냥 입을 보탤 필요도 없다. 나쁜 놈이다. 그럼 에반게리온에서 캐릭터 디자인은 중요하지 않은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카리 신지,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 아야나미 레이, 카츠라기 미사토 등등 우리의 중고딩 시절의 밤을 점령했던 그 캐릭터들, 다 사다모토 요시유키 저 녀석이 디자인한 캐릭터이다. 물론 신극장판에 등장한 마리 뭐시기도 저 나쁜 놈이 만든 캐릭터다.
어렸을 때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뭔가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미려한 연출에 탄복하며 인생영화라 여기며 봤다. 결국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멋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애니메이션을 남자 애니메이션 오타쿠의 판타지를 충실히 충족시켜주고 재미는 꽤 있지만 철학적으로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주인공인 이카리 신지를 둘러싼 여캐 3명만 보자. 하렘물의 전형적인 구성아닌가.) 유튜브나 이런데를 잘 뒤져보면 에반게리온을 해석하면서 온갖 철학적 미사여구를 더한 글이나 영상도 봤지만,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요리사가 정말 끝내주는 두부의 맛을 고객에게 전달해주고 싶다면, 그 두부로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서 제공하면 된다. 순두부찌개도 있을 것이고, 두부김치도 있을 것이고, 두부찜도 있을 것이고 두부를 활용한 수많은 요리들이 있다. 두부의 진정한 맛을 전달하겠다는 요리사가 그 두부를 가지고 으깨어서 영화 향수에 나오는 것처럼 유지에 흡착을 하고 증류를 하고 희석을 하고 조미료를 첨가한 다음, 숙성하여 손님에게 요리로 내놨다고 치자. 손님이 진정한 두부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걸까? 진정한 두부의 맛을 전하고 싶다면 진정한 두부의 맛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이번에 나온 에반게리온 신극장판4(다카포, 리피트, 3.0+1.0 등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리는 듯 한데, 나는 그냥 신극장판4로 통칭하겠다.)는 어떤 의무감 혹은 종지부를 찍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감상에 들어갔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TV시리즈가 마감이 된게 1998년이고, 리부트라고 할 수 있는 신극장판이 처음 나온게 2007년이다. 직전작인 Q가 나온 시점이 2012년이다. 그리고 9년만에 최종편이 공개되었다. 무려 20여년의 세월에 걸쳐서 완성된 시리즈다.
처음 감상에 들어간 건 아마존 프라임에 공개되고 얼마지나지 않아서였다. 한 40분정도 봤는데 너무 지루했다. 예전 에반게리온 TV시리즈에서의 일상파트는 정말 재밌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는 별로 재미도 없고 오히려 오글거리기만 했다. 시간도 없고 나중에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에 감상을 종료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Q의 줄거리를 찾아서 읽은 다음, 이전 내용을 숙지한 상태로 관람을 다시 시작했다. 전편의 대략적인 이야기를 알고보니 전에 봤을때보다 지루하지 않았다. 꽤 볼만했고 마지막 1시간은 놀라웠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점은 지난 20여년동안 이어져온 에반게리온의 거의 모든 떡밥이 마지막 1시간동안 깔끔하게 회수된다는 점이다.
※ 이하 스포 있습니다.
일단 그놈의 이카리 겐도가 왜 인류를 멸망하려고 하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이 꽤나 설득력있게 제시된다. 애초에 이 놈이 사랑꾼에다가 사이코패스라는 건 얼추 알고 있었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굳이 인류를 멸망할 필요가 있냐는 말이다. (극중에서는 인류보완계획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에바 좀 본 사람은 다 알지 않나. 인류보완계획이 실은 인류멸망계획이라는 것을. 사도도 실은 그 인류멸망계획을 막으려고 내려오는 존재들이다. 주인공이 실은 나쁜 놈이고 악당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착한 놈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예전에 없었던 이카리 겐도, 개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려 이카리 겐도가 말이다. 항상 손깍지를 끼고 안경을 올리면서 자기 할말만 툭 던지고 사라졌던 그 이카리 겐도 말이다. 평생을 외톨이로 살아온 이카리 겐도에게 유일한 친구이자 사랑이 되어준 이카리 유이는 일종의 구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카리 신지가 꼭 초호기에 타야하는 이유가 더 강고해진다. 단순히 어머니인 이카리 유이가 초호기에 흡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카리 겐도가 인류 멸망의 마지막 키로서 아버지인 이카리 겐도와 반대편에서 트리거가 되어줄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인류보완을 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김치도 있고 두부도 있고 고기도 있고 참치도 있고, 각각의 재료가 각자의 형태를 가지고 어우러져 있을때 우리는 그것을 진짜 김치찌개라고 부른다. 김치를 녹이고 두부를 녹이고 고기를 녹이고 참치를 녹여서 단백질과 탄수화물과 조미료가 범벅이 된 걸쭉한 스프같은 걸 만든다고 해서 그게 이카리 겐도가 그 난리굿을 직여서 만들고자 했던 낙원이 되겠느냐는 말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20여년을 끌어온 에반게리온의 마무리로써 나는 꽤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