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 놀러가서 놀던 중에, 우연히 내 이름 세글자를 쳐봤다.
설마 있겠나 싶어서 쳤는데, 헉 있었다.
박영필이란 세글자 딱 있었다. 물론 한문은 한글자 틀렸다.
나는 박영필(朴永弼)을 쓰는데, 그 분은 박영필(朴英弼)을 썼다.
즉, 가운데 글자가 그분은 꽃부리 영자였고, 난 길 영자를 썼다. 그게 유일한 차이.
그러면 그 분의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먼저 태종실록에 등장한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5년 서기 1418년 박영필이란 사람의 첫 기록이 나왔다.
박영필이란 사람에 대한 설명이 간단하게 나오는데, 그 원문을 따르면,
"또 사약(司鑰) 박영필(朴英弼)이 비록 소인(小人)이라 하더라도 심히 정직하므로 나를 속이지 아니할 것이니, 또한 마땅히 나아오게 하여 그 실정을 물어서 아뢰어라. 만약 혹시라도 모의에 참여하였다면 내가 마땅히 용서하지 아니하겠다."
그 분 박영필은 소인이었다. 하지만 정직한 분이셨다.
나는 여기서 이 분의 관직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약이란 관직은, 액정서에 딸린 벼슬로 대전(大殿) 및 각 문(門)의 열쇠를 보관(保管)하는 일을 맡아보았다고 한다. 이 액정서란 관청은 이조 속아문(吏曹屬衙門)의 잡직관서(雜職官署)로, 내시부에 부설되어 왕명 전달, 궁궐 열쇠 보관, 대궐 정원 관리, 임금이 쓰는 붓 · 벼루 · 먹 등의 조달을 맡은 관청이었다.
즉, 이분은 액정서란 관청안에서 사약이란 관직을 가지고 계신 정6품의 양반이셨다. 근데 한가지 여기서 주의를 끈 것은 이 액정서란 관청은 잡직관서란 점이다. 잡직이란, 사무(事務)를 담당(擔當)하지 않고 잡무(雜務)에만 종사(從事)하던 관직(官職)을 말하는데, 최고(最高) 정6품(正六品)으로서 그 이상(以上)의 품계(品階)에는 오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분은 정 6품의 관직인 사약을 더이상 올라가시지 못하시고 은퇴하셔야 했을까?
여기서 태종실록을 넘겨 세종실록으로 넘겨가보자.
세종실록 61권, 세종 15년 서기 1433년이 이 분의 조선왕조실록에서의 마지막 기록이다.
여기 원문을 실으면,
"4품 이상은 월대 위에서 동서로 서로 마주 보게 하니, 동쪽에는 행 사직(司直) 이양달(李陽達) 등 5인과 전 소감(少監) 방유신(方有信) 등 5인이고, 서쪽에는 전 판군기감사 박계손(朴季孫) 등 4인과 전 부정(副正) 박영필(朴英弼) 등 6인이며..."
여기에 세종이 근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푸는데, 4품 이상의 품계를 가진 사람으로 전 전 부정(副正) 박영필(朴英弼)이 등장한다. 여기서 부정이란 관직은 종 3품의 관직으로 각 관서의 부책임자를 뜻하는 것이다.
즉, 이 분은 태종대에서 세종대까지 관직생활을 오래하셨고, 결국 종 3품인 부정의 관직에 까지 오르셨던 분이셨다. (아까전에 잡직으로서 사약에 계셨던 것은 아마 체아직으로 잠시 액정서에 가서 일을 도와주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 분은 관직에서 물러나 천수를 누리시며, 세상을 떠나신걸로 보인다.
소인이셨지만, 결국 정직하셨기에 이분은 만족할만한 삶을 사신 걸로 보인다.
오늘 좋은 경험이 된 거 같다.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한문은 다르지만.) 600년전 이 한반도위에서 살아가셨던 분의 삶을 알게 되어서 조금은 특별하고 신비한 경험이 아니었나 하고 자답해 본다.
결론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참고자료 : 조선왕조실록 인터넷판 http://sillok.history.go.kr/
검색포털 네이버 사전 http://dic.naver.com/